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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타고니아의 역사 1 - 2

파타고니아는 설립자 이본 쉬나드에 의해 시작된 브랜드이다.

이본 쉬나드는 어린 시절부터 환경적으로 등반과 자연에서 할 수 있는 활동이 활발한 사람이었다.

쉬나드는 등반장비를 직접 만들기 위해 화덕을 사고 모루, 집게와 해머들을 구입해 대장간 일을 독학하기 시작했다. 

높은 암벽을 등반하기 위해서는 수백 개의 피톤을 박아야 했는데 모든 장비는 뒤따르는 다른 정복자들의 등반을 쉽게 하기 위해서 그 자리에 남겨두었다. 다시 사용하려고 뽑아내다 보면 피톤의 머리가 부서지곤 해서 몇 번이나 뽑아서 다시 사용해도 되는 피톤을 만들었다. 

 

'산에 오르거나 자연을 찾을 때는 그곳에 갔던 흔적을 남기지 말라'

헨리 데이비드 소로, 랄프 왈도 에머슨, 존 뷰어와 같은 초월적인 사상가들의 글을 읽으면서 영향도 받았다.

 

부모님의 도움을 받아 카라비너 (타원 또는 D자형 강철고리)를 만들기 위해 낙하단조 주형을 구입하고 집 뒷마당 낡은 닭장을 작업장으로 만들어 겨울에는 장비를 만들고 그 외 시간은 자연 속에 머무르는 시간을 보냈다.

군대 제대를 하고 다시 등반 장비를 만들기 시작했고 1964년 첫 번째 카달로그를 만들었다.

장비에 대한 수요가 손으로 만들어서는 감당할 수 없을 정도까지 늘어나는 바람에 보다 정교한 도구와 기계를 사용하기 시작했고 그즈음 톰 프로스트, 도린 프로스트와 동업을 시작했다.

 

동업을 한 9년 동안 거의 모든 등반 장비를 재설계하고 개선시켜 더 강하고 더 가볍고 더 단순하고 더 기능적으로 만들었는데  '최우선은 항상 품질'이라는 마음가짐으로 진행을 했다. 적절치 못한 도구는 사람을 죽음에 이르게 할 수 있고 우리 자신이 우리 제품의 최대의 고객이었으므로 죽음에 이르는 그 사람이 우리가 될 수 있었다. 디자인에 있어 우리의 지침은 프랑스의 비행사 앙투안 드 생텍쥐페리의 사상을 바탕에 두었다. 

 

........... 사람이 하는 모든 산업활동, 모든 계산과 추정, 사람들이 초안을 만들고 청사진을 그리는데 보낸 모든 밤들은 하나의 원리로 수렴된다. '단순성'이라는 궁극의 원칙으로 가구의 곡선이나 배의 용골이나 비행기의 동체를 다듬는다고 생각해 보자......... 어떤 것이든 완벽은 더 이상 더할 것이 없을 때가 아니라 더 이상 뺄 것이 없는 무엇 하나 걸치지 않는 적나라한 상태에 이를  때 달성된다.

선을 통해 나는 단순해지는 법을 배웠다. 단순해지는 것이 가장 풍성한 결과를 내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디자이너들은 뭔가 추가해서 도구의 성능을 높이려고 했지만, 톰프로스트와 나는 '제거'를 통해 즉 보호라는 목적이나 강도를 희생시키지 않으면서 무게와 부피를 줄이는 방식으로 같은 목적을 달성했다.

 

등반가들은  장비를 구입하기 위해 작업장에 들르곤 했다.

사업에 천부적 재능이 있는 로저의 관리로 소매판매에서 도매판매로 확장이 되었다.

사업 그 자체를 목적으로 삼는 사람이 없었고 일한 시간대로 급료를 받았고, 사업은 그저 등반 여행을 떠날 수 있도록 비용을 마련하는 수단으로 쉬나드는 생각했다.

매출이 늘었어도 쉬나드 이큅먼트의 연 수익률의 1퍼센트 정도에 그쳤다. 끊임없이 새로운 디자인을 개발하고 3~5년 정도 감가상각을 해야 하는 하는 도구나 주형을 1년 만에 폐기하곤 했기 때문이다. 경쟁은 심하지 않았다. 그런 시장에 뛰어들려는 다른 바보가 없었기 때문이었고 1970년 쉬나드 이큅먼트는 미국 최대의 등반장비 공급업체가 되었다.

그것은 환경 파괴의 장본인이 되는 길의 시작이기도 했다. 느리기는 했지만 꾸준히 등반의 인기가 높아지면서 볼더 인근의 엘도라도 협곡, 뉴욕의 샤와 정크, 요 시메티 계곡과 같이 잘 알려진 루트에 사람들이 몰리게 되었다.

 

포스트로와 쉬나드는 피톤 사업을 단계적으로 폐지하기로 결정했다. 수년에 걸쳐 밟게 될 환경보호를 향한 발걸음의 시작이었다. 피톤은 사업의 중추였지만 그 사업으로 인해 그들이 사랑해 마지않은 암벽들이 훼손되고 있었다.

다행히 피톤을 대체할 수 있는 물건이 있었다. 

스터퍼와 헥센트릭이라는 이름으로 쉬나드 이큅먼트 버전의 초크를 만들어 소량씩 판매를 했고 1972년부터 쉬나드 이큅먼트 카탈로그에도 포함시키기 시작했다.

이 카탈로그는 피톤의 환경적 해악에 대한 사설로 시작된다.  초크의 사용법을 다룬 시에라 클럽등반가 더그 로빈슨의 14쪽짜리 글도 실렸다. [클린 클라이밍]이라는 제목의 글로 강렬한 문장들로 시작되었다. 

 

'등반가의 보호 장구가 등반의 흔적을 남기는 일은 거의 없기 때문에 클린이다. 바위에 변형을 주지 않고 등반하는, 자연인으로서의 유기농 등반에 한 걸음 가까이 가는 활동이 클린 클라이밍이다.'

카탈로그가 발송되고 몇 개월 만에 피톤 판매가 줄어들었다. 초크는 만들 수 있는 것보다 더 빠른 속도로 팔려 나갔다.

몸에 착용한 용품들 중에 스터퍼와 헥센트릭, 카라비너등이 있음.

그즈음 의류에 대한 첫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1960년대 후반 영국피크지구에서 크랙등반을 마친 쉬나드는 랭커려의 오래된 공장에 들렀다. 질기고 엄청나게 무거운 코듀로이 천을 만드는 기계들이 마지막으로 남아있는 곳이었다. 데님 이전에는 작업복을 코듀로이로 만드는 것이 보통이었도,  이 내구성 좋은 원단이 등산에 적합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옷감을 주문해서 엉덩이 부분이 이중으로 된 반바지와 니커스(무릎 바로 아래까지 내려오는 반바지)를 몇 벌  만들었다.

그리고 다음으로 낸 아이디어가 큰 반향을 일으켰다. 겨울등반, 암벽등반에 적합하겠다는 생각으로 럭비팀이 입는 셔츠를 만들어 팔았다. 

1972년 버려진 정육공장을 인수해 그곳의 낡은 사무실을 소재점으로 개조하기 시작했다, 판매할 아이템라인을 더 늘렸고, 배낭 몇 가지를  디자인을 해서  도축장 위에 있는 다락에 본격적인 봉제 작업장을 운영하게 되었다.

의류에 대한 아이디어를 내는 동안 스키 또는 등반용 배낭 아이디어를 내놓았다. 

'솔직히 바느질에 대해서는 우리가 부족할 수 있다. 하지만 좋은 대장장이가 그렇듯 물건을 튼튼하고 기능적이고 단순하게 만드는 방법에 대해서는 잘 알고 있었다. 배낭은 그리 잘 팔리지는 않았고 우리가 손으로 만든 의류는 고객들로부터 우호적인 반응을 얻었다.'

점점 더 많은 의류를 만들게 되면서 의류라인에 대한 이름이 필요해졌다. 장비회사로서 쉬나드 이큅먼트가 가진 이미지를 희석시키고 싶지 않았고, 오로지 의류제품에만 연관된 것을 원치 않았다.

1973년, 진짜 파타고니아와의 강한 연계를 위해 풍풍우가 몰아치는 하늘, 피츠로이산의 스카이라인을 기초로 한 삐죽삐죽한 봉우리, 푸른 파다가 있는 상표를 만들었다.

 

이 상표를 단 럭비셔츠는 인기를 끌었지만 품질이 형편없는 봉제공장과의 공급계약과 생산으로 큰 재앙이 되었다.

등반 장비라면 재고를 훤히 꿰고 결함도 직접 검사해 관리할 수 있었는데 옷은 달랐다. 대장간을 운영하는 것과 옷 장사를 하는 것이 천지 차이라는 것을 배웠다.

이  상황을 맡았고 소유주들의 변덕스러운 창의성을 헤아려줄 새로운 사업부장을 만났다. 크리스는 자금조달을 안정시키고, 영업인력을 격려하고, 독점계약을 따내고, 산만한 직원을 다독이고, 친밀감과 풍부한 감성으로 회사를 하나로 뭉치게 만들었다.

'나는 스스로를 사업가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나는 등반가였고, 서핑을 하는 사람, 카약을 하는 사람, 스키를 타는 사람, 대장장이였다. 나는 그저 나 자신과 친구들이 원하는 좋은 도구와 기능적인 옷을 만드는 것을 좋아했을 뿐이다' 그렇지만

사업가가 되어야만 한다면 나만의 방식으로 사업을 해야 한다는 것이 쉬나드의 생각이었다.

 

"기업가가 무엇인지 알고 싶다면 비행 청소년을 연구하라"

정말 사업가가 되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사업가가 되려면 좋은 명분들이 필요했다. 다행히 쉬나드에게는 사업을 확장하더라도 절대 놓치고 싶지 않은 것이 있었다.

일은 늘 즐거워야 한다는 점이다. 

어떤 일이든 사전 준비를 다 갖추기 전까지는 거기에 뛰어들지 않는다.

사업지식을 쌓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사업에 대한 책을 모조리 읽으면서 나에게 맞는 사업철학이 있는지 살펴보았다. 

미국 회사 중에는 롤모델로 삼을 만한 곳이 없었다. 그중 ' 에스프리'만은 예외였다. 

몇 년 후 쉬나드는 카약에서 획기적인 발전을 이루어냈다. 

 

'나는 항상 나 자신을 80퍼센트 까지는 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해 왔다. 나는 스포츠를 비롯한 모든 활동에 80퍼센트의 능숙도를 달성할 때까지 열성적으로 임한다. 80퍼센트의 수준에 이르면 시들해져서 젼혀 다른 일로 이동한다. 파타고니아의 제품라인이 그토록 다양하고 우리의 다재다능하고 다면적인 의류들이 크게 성공한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이 아닐까 싶다.'

 

1. 첫 기능성 제품 - 폼백 재킷

   내부 물방울이 많이 생기던 당신의 폴리우세탄 소재 제인웨어에서 한 차원 더 발전한 제품이다. 

   예측할 수 없는 날씨가 생명을 위협할 수 있는 고산지대에서 어떻게 옷을 입어야 할까 하는 보다 큰 문제에 접근

2. 파일 스웨터 

  북대서양 어부들이 즐겨 입는 옷, 습기를 흡수하지 않으면서 보온이 잘됨. 

  폴리에스테르 옷감은 외피와 함께 사용할 경우 놀랄 만큼 따뜻했다. 젖어도 보온이 되었고 빨리 말라 등반가들이 입어야 

  할 옷의 숫자를 줄여주었다.

3. 폴리프로필렌으로 만든 보온 속옷

  폴리프로필렌이라는 합성 섬유는 가볍고 물을 전혀 습수하지 않아 물에 뜨는 해양 로프와 같은 선업제품을 사용.

  처음 의류에 적용된 것은 일회용 기저귀의 부직포 안감이었고, 이것은 발수성과 속건성이 커 피부에서 땀을 제거하고

  수분을 기저귀 외피에 있는 흡수력이 큰 소재 쪽으로 이동시키는 기능을 함. 

  우리의 니트옷감은 안쪽에 솔질을 해서 공기층을 더 만들고 부드러움을 더했기 때문에 4배 더 두꺼웠다.

 

◆ 겹쳐 입기 (레이어링)

동종 업계와 고객들에게 겹쳐 입기 (레이어링)라는 개념을 가르치는 첫회사가 됨,

겹쳐 입기란 피부에 닿는 내의는 땀을 흡수하는 기능성 베이스레이어를 입고, 그 위에 보온성을 높이는 미드레이어를 겹쳐 입고 그 위에 바람과 습기로부터 몸을 보호하는 방풍, 방수 쉘 재킷을 착용하는 접근법을 말한다.

 

* 새 속옷의 기능을 제대로 활용하는 방법을 카탈로그를 통해 알림

 

그럼에도 소재의 단점과 발생하는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 노력함.

파일직물의 질을 개선하기 위해 인조모피 원단을 개발했고, 결국에는 보풀이 전혀 생기지 많으며 더 부드러운 양면원단 

신칠라를 개발함. 한발 더 나아가 대체품도 개발하였다.

 

4. 캐필린 폴리에스테르 -  폴리프로필렌 베이스 레이어 라인

  새로운 대체 소재로 이루어진 제품 라인.

5. 아웃도어 제품에 다채로운 색상 도입

 질기고 튼튼한 성질은 그대로 유지하되 화려하고 자유분방한 이미지로 변화

 

파타고니아 상표는 럭비셔츠와 같은 유행의 하나로 자리매김했고, 인기 있는 아웃도어 시장을 넘어 패션 소비자들에게로 확장되었다. 모든 영역 전략과 카탈로그 공간은 오랜 진성팬들에게 겹쳐있는 의류의 기능적 장점을 설명하는데 할애되었지만 가장 잘 팔리는 제품은 헐렁한 비치 반바지와 외피가 있는 봄버 스타일 신칠라 재킷등 오히려 기능성이 가장 떨어지는 것들이었다.

.... 등등....

파타고니아는 양적으로 성장했지만, 여러 가지 면에서 문화적 가치를 놓치지 않았다.

 


I THINK

 

우리는 누구나 환경적 영향을 받는다. 나라, 문화, 사화, 가족, 주변 관계, 지역, 시스템... 등등 알게 모르게 아주 다양한 영향을 받는다. 이본 쉬나드 역시 그러한 경우이다.

자연을 접하고 경험할 환경과 조건이 많았고,  자연을 경험하는 사람들은 다른 누구보다 자연의 생태계에 시선이 갈 것이라고 본다. 자연환경에 문제가 있다면 그대로 보고 느낄 수 있기 때문에.

각자 주어진 환경 안에서 보이는 것들이 있다. 때로는 불편함과 거북함으로 다가왔던 것들이 자세히 들여다보다 보니 어떤 심각한 문제가 있음을 발견하게 되고 이것이 우리에게 어떤 좋지 않은 영향을 주는지 이로운지 생각해 보게 되고 그것을 위해 어떻게 해야 할지 움직이게 되는 상황들 말이다.

어느 곳에 있던, 누구나 그런 것은 아니지만, 이본 쉬나드와 그의 친구들은 문제를 볼 줄 아는 시선과 인성이  있었다고 본다.

그것이 누군가에 의해서도 아니고 자신의 삶에서 자연히 녹아 움직이게 하는 하나의 근간이 되었다고 생각한다.

.

그런 사람과 친구들이 사업을 한다.

처음엔 등반 시, 자연을 덜 훼손하는 도구를 위해서 , 그러다 활동하기 편한 옷으로 시선이 넘어갔고.

그것은 당연한 과정이고 순서인데, 그럼에도 참 아이러니함이 넘친다.

자연을 생각하는데 자연파괴에 한몫을 하는 의류를

기업가가 되어가야 하는데 기업가 같지 않은 기업가가 되어야 하고

돈을 버는 일을 하는데 크게 돈을 어마어마하게 버는 것이 큰 의의도 아니고

일을 열정적으로 하는데 결과가 어마어마한 물질적 축적으로 가는 것도 아니고

도전을 하고 결과를 만든 것이 자연을 파괴하고 있다면 판매를 하지 않고

다시 연구하고 개발하고 문제를 해결한다. 

지극히 자본주의적인 것들에는 역행하는 모습이다.

그런데 그런 아이러니한 생각과 질문과 개선의 연결고리이자 고민 자체가 파타고니아를 있게 하는 철학적 기준이 된 것이 아닐까 싶다.

그저 돈을 많이 벌면 된다는 자본논리만 있는 회사이고 사람들이라면 지금까지 파타고니아가 지속되고 있었을까?

.

어떤 것이든 완벽은 더 이상 더할 것이 없을 때가 아니라 더 이상 뺄 것이 없는 무엇 하나 걸치지 않는 적나라한 상태에 이를  때 달성된다.

 

이것은 정말 쉽지 않은 관점이다.

무엇을 만드는 일을 하는 데 있어서는. 어떤 것을 만드느냐가 문제겠지만, 의류라는 물건을 만드는 일에선 특히 내공 깊은

관점이고 표현이다.

비움, 채우지 않음으로 보이는 완성됨과 완벽.

더하고 채우는 것은 사실 쉽다. 쓸모를 떠나 튀고 돋보이게 하기에는.

선택의 폭이 작은 선에서 완벽한 완성을 하는 것은 진정성과 본질의 핵심을 만드는 것이니, 그런 생각과 관점의 신념을 

우선으로 하고 기업을, 사업을 한다는 건 쉬운 일은 아니다.

.

그리고, 파타고니아의 경쟁상대는 다른 기업, 다른 브랜드, 다른 곳이 아니다.

온전히 자신과의 경쟁이고 자신과의 싸움이다.

누구를 위하여 이전에 나를 위하여 , 나에게 좋은 것이 타인에게도 좋을 수 있는 것이라는 생각이 만들어가는 결과들이

어떤 것들의 대체도, 비교도 아닌 독자적이고 창의적인 자신들 만의 방식과 기준을 만들어 간다고 본다.

.

이것이 자신만의 철학적 생각, 관점, 시선, 신념이 있어야만 만들어지는 것들이기에

무엇을 보고, 듣고, 생각하고 , 수용하고, 경험하고, 나와 주변을 생각하느냐가 흔들림 없이 자신만의 길을 가는데

중요한 기준이 되는 것 같다.

.

누구나 한 가지 분야에서 오랜 시간 열정을 쏟아본 사람이라면 자신만의 기준이 있을 것이다.

자신만의 기준과 원칙, 신념과 철학이 있어야, 융화도 연결도 같은 결로 흘러갈 수 있다.

그것이 자신을, 그리고 자신이 만들어낸 결과에도  고스란히 드러나기에.

누구나 자신의 길에는 자신만의 이유와 명분이 있겠지만

창의적으로 무엇인가 만들고 결과물, 사물을 탄생시키는 사람들은 더욱더  자신만의 철학이 있어야 한다고 본다.그리고, 그 철학은 타인에게 환경에 해가 되는 것이라면 존재의 방향성과 지속성은 달라지는 게 아닐까 싶다.